Vision & Logic

post search result

스포츠와 관련된 글 2개를 찾았습니다.

  1. 2007/11/03 마르티나 힝기스 은퇴 발표
  2. 2007/03/22 박동희씨가 숨졌군요. (5)

blog post

Vision/해외

마르티나 힝기스 은퇴 발표

This post is licensed under the Creative Commons (by)(sa) Attribution/Share Alike 2.0 license
사용자 삽입 이미지
스위스의 테니스 스타 마르티나 힝기스 (Martina Hingis)가 은퇴를 발표했습니다. 1994년 14살의 나이에 프로 테니스 선수로 데뷔한 후 2003년 은퇴할 때까지 단식 우승 40번, 복식 우승 36번을 차지하며 세계 여성 테니스계를 지배했습니다.
2006년 프로 테니스계에 복귀한 이후 몇 번 우승을 차지하긴 했지만,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지는 못했습니다. 힝기스는 지난 11월 1일 건강상의 문제 등으로 은퇴를 발표했습니다. 언론은 윔블던에서 행한 약물 검사에서 코카인이 검출되었기 때문에 은퇴하는 것으로 추측하지만, 힝기스는 자신은 코카인을 쓴 적이 없다고 합니다. 수많은 최연소 기록을 갈아치운 스타 치고는 매우 쓸쓸한 퇴장이네요.

출처: Le Figaro, Wikipedia


Daum 블로거뉴스
블로거뉴스에서 이 포스트를 추천해주세요.
http://bloggernews.media.daum.net/news/445853
추천하기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top

About this post

이 글에는 아직 트랙백이 없고, 아직 댓글이 없고, 스포츠 태그가 달려있으며,
2007/11/03 10:11에 작성되었습니다.

COMMENT, easiesy way to give a feedback.

댓글 쓰기


blog post

Vision/국내

박동희씨가 숨졌군요.

This post is licensed under the Creative Commons (by)(sa) Attribution/Share Alike 2.0 license
한때 프로야구계의 기대를 한 몸에 모은 기대주였지만 끝내 꽃을 피우지 못하고 불의의 사고로 죽었네요. 참 안타깝습니다. 인터넷에서 박동희 선수에 관한 글이 있기에 옮겨봅니다. 원출처는 http://yagoo.innori.com/55이고, 2차출처는 clien.net입니다.

최동원이나 선동열 등과 같은 야구 자체를 지배하는 에이스중의 에이스는 정말 10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하는 존재입니다. 최동원과 선동열의 한국야구를 대표하는 에이스계보를 이을 것으로 예상되었던 한 선수가 있었습니다. 뛰어난 체격조건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속구는 그의 전매특허였지만, 프로에서는 그 이름값에 걸맞는 성적을 한번도 남기지 못했고, 또한 해설가들과 찌라시들의 이지메대상이 되었던 그. 광속구와 슈퍼베이비라는 상반되는 별칭을 달고 달았던 그의 이름은 박동희입니다.

중학시절부터 강속구투수로 유명했던 박동희는 경남고와 함께 부산야구를 양분하고 있는 부산고에 진학했습니다. 1983년 고교야구를 대표하는 선수는 전국대회 3관왕에 빛나는 광주일고의 문희수였지만, 투타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친 2학년이었던 박준태와 부산고의 1학년 에이스였던 박동희는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박동희는 번번히 중요한 순간에 천안북일고의 벽에 막혔지만, 청룡기 4강과 화랑기 준우승으로 이끌면서 앞으로 박동희시대가 올 것임을 예감시켰습니다. 초고교급투수 박동희를 앞세운 부산고의 독주가 예상되었지만, 선수(투수)보호를 내세워서 6이닝 이상을 투구한 투수는 다음 경기에 출전하지 못한다는 규정이 생기면서 고교야구는 군웅할거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선수보호를 이유로 내세웠지만, 사실은 나눠먹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뛰어난 투수를 보유한 1~2팀의 독주방지와 대학특기생의 확대 등을 위한 것으로, 박형렬과 이용호라는 2명의 A급 투수를 가진 서울고가 가장 큰 혜택을 차지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박준태와 이광우 등과 함께 고교야구를 평정할 것으로 기대되었던 박동희는 화랑기에서 우승을 차지하는데 그쳤습니다. 고교시절의 마지막이었던 1985년 봉황기에서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면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예선에서 결승까지 5경기에 등판해서 34이닝을 던지면서 방어율 0을 기록하면서 역시 박동희라는 정말 자신의 이름값에 걸맞는 활약을 펼쳤습니다. 당연히 주연은 박동희였지만, 2년생이었던 언더드로 권영일이라는 뛰어난 조연이 있었기에 가능한 기록이었습니다.


연고구단인 롯데와 고려대의 치열한 스카우트경쟁 끝에 고려대로 낙찰되었습니다. 만약 이 때 박동희가 프로행을 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라는 아쉬움도 남지만, 투수들의 무덤으로 불리는 롯데를 생각하면 별반 다르지 않았겠지만, 고려대진학은 박동희의 결과적으로 패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대학이던 소수의 투수들을 혹사시키는 것은 똑같지만, 엄청난 스카우트비를 들여서 고교유망주들을 입도선매하는 고려대나 연세대, 한양대 등은 그에 걸맞는 성적이 야구부에 요구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소위 말하는 야구 명문대의 감독들은 고교야구팀의 감독보다 많은 자원을 가지고 있지만, 믿을 수 있는 한 두명에게 올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교와 대학시절 야구천재로 불렸던 박노준의 경우처럼 지나친 혹사로 아픈 어깨를 감싸안고 던질 수밖에 없었고, 또한 그것을 투지가 좋다는 식으로 영웅시하는 경향도 있어서 정작 프로에서는 경기에 출전하는 날보다도 부상으로 신음하는 날이 더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당시 고려대는 선동열과 박노준 등이 연속으로 졸업해서 마운드의 높이가 낮아졌다고 해도 A급투수인 진정필, 허정욱 등이 있었지만, 박동희 일인에 대한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았습니다. 1학년이었던 1986년 박동희는 대학야구에서 16승 1패를 거두었습니다. 이해에 열린 대회는 서울대를 포함한 18개 대학팀이 참가한 3개대회(춘계연맹, 대통령기, 추계연맹)로, 춘추계연맹전의 경우 4개조로 나누어서 8강, 4강, 결승이 벌어짐으로서 결승까지 포함해서 최대 6경기에 가질 수 있고 토너먼트로 열리는 대통령기에는 최대 5경기로, 실업이 참가하는 백호기를 계산에 넣더라도 박동희가 얼마나 많은 경기에 출전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어쨋든 대학무대에 첫선을 보인 박동희는 추계연맹전에서 우승을 하였지만, 그의 진가가 드러난 것은 네덜란드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였습니다. 혼자 4승을 거두면서 최다승 투수상을 받으면서 한국대표팀을 쿠바에 이은 준우승으로 이끌면서 국가대표 에이스로 발돋음했습니다.

국가대표와 대학을 오가면서 팀의 에이스로서 동분서주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박동희는 1988년 춘계연맹전에서 자신의 진가를 다시 한번 드러냈습니다. 예선에서 결승전까지 7경기에 모두 등판해서 6승을 거두면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고, 원광대와의 예선전에서는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면서 올림픽에 대한 기대감을 주었습니다. DDD와 자칭 보통사람의 유일한 자랑꺼리로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들을 수밖에 없었던 올림픽이기에, 야구협회도 시범경기지만 금메달을 위해서 강기웅, 조계현, 노찬엽, 송진우 등 국가대표로서 활약한 선수들의 프로진출을 1년간 유예하면서, 역대 최강팀을 자신하였습니다. 하지만, 미국과 일본에게 패해서 3, 4위전으로 밀린 한국은 예상외로 푸에르토리코에게 덜미를 잡히면서 4위에 그쳤습니다.

뛰어난 체격조건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속구를 트레이드마크로 1학년 때부터 태극마크를 달고 에이스로 활약한 박동희가 선동열만큼 강한 인상을 남기지 못한 것은 1988년과 1982년의 차이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동열은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그전까지 한국야구의 대명사였던 최동원을 대신하여 에이스로서 맹활약하면서 한국을 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프로가 출범했지만, 여전히 아마야구가 인기가 있었고, 일본과의 결승전에서 드라마틱한 승리를 거두었기에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강하게 남았습니다. 반면, 프로야구의 급성장에 따른 고사직전에 있던 아마야구에서 가장 큰 이벤트이고, 게다가 한국에서 열린 올림픽에서 미국과 일본에게 연패하면서 메달권밖으로 떨어졌기에 오히려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 돌팔매에 맞아 죽다

아마야구의 에이스로 맹활약한 박동희는 1990년 롯데 자이언츠에 당시 역대 최고 계약금인 1억 4천만원을 받으면서 최동원-선동열에 이은 선동열-박동희라는 신구라이벌대결에서 누가 이길까?, 그리고 최동원 이후 약체인 롯데가 선동열의 해태처럼 우승신화를 이룰 수 있을까? 등 많은 관심 속에 입단했습니다. 4월 11일 대구구장에 프로야구에 그 첫선을 보였습니다. 6회에 구원등판해서 홈런을 맞아서 1실점하였지만, 6연속 탈삼진을 뺏는 등 탈삼진 10개를 기록하면서 이름값에 걸맞는 화려한 데뷔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마시절의 혹사로 인한 팔꿈치부상과 제구력에 문제점을 드러내면서 10승 7패 7세이브라는 성적표를 남겼습니다. 신인이 두자리 승수를 채운 것은 대단한 활약을 펼쳤다고 할 수도 있지만, 박동희라는 이름을 생각하면 아쉬움이 남는 성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프로 2년차로서 기대되었던 1991년 시즌에 14승을 거두었지만, 박동희에게 기대한 것은 2, 3선발투수가 아닌 에이스로서의 모습이었기에 약간은 실망스러운 성적이었지만, 126경기에서 보여주지 못한 강렬함을 삼성과의 준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보여주었습니다. 1차전에서 패전을 기록했던 박동희는 3차전에서 3회말 1사 3루에서 구원투수로 등장했습니다. 2:1 아슬아슬한 초반 리드를 잡고 있던 롯데로서는 박동희가 위기상황을 해제해주기를 바라는 심정이겠지만, 반대로 삼성의 입장으로서는 동점찬스에서 최소한 희생타를 기대하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힘찬 와인드업과 동시에 박동희가 던진 초구가 보이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너무나도 빠른 공이어서 눈에 보이지 않았나 ... 라고 생각했더니, 왠걸 공은 박동희의 손에서 떠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후에 박동희는 투수판이 미끄러워서 공을 제대로 던질 수 없을 것 같아서 안던졌다고 했지만, 보기에는 지나치게 긴장해서 공을 던지지 못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허망하게 보크로 동점이 되면서 슈퍼베이비라는 달갑지 않는 별명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승부의 저울추가 삼성으로 기울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후 박동희는 광속구를 앞세워서 두번 다시 보기 힘든 호투를 펼쳤습니다. 당시 유격수였던 공필성의 어의없는 플레이(정말 이때는 저 넘이 국가대표출신이 맞나라는 의심이 들정도였는데)로 1실점을 했지만, 10과 2/3이닝동안 탈삼진 15개를 기록하였습니다. 삼성의 김성길의 호투로 13회 무승부로 끝났지만, 그의 능력을 유감없이 보인 경기였다고 생각합니다.

준플레이오프에서의 호투로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투수로서 성장이 기대되었던 1992년 부상과 코칭스탭과의 불화에 신인인 염종석의 활약 등이 겹치면서 박동희는 잊혀진 존재가 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염종석의 눈부신 호투와 이종운의 가세로 완성된 소총타선은 야생야사의 야도 부산을 뜨겁게 달구면서 3위를 차지하면서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였습니다. 삼성과의 리턴매치에서 2차전에 선발로 나선 박동희는 완봉승을 거두면서 환호하였지만, 해태와의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난타당하면서 코칭스탭으로부터 신뢰감을 완전히 상실하였습니다. 염종석의 대활약으로 천신만고 끝에 해태를 꺽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했지만,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에서 염종석이 지나치게 혹사당했기에 승부의 여신은 빙그레에게 웃음짓는듯 하였습니다.

코칭스탭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박동희를 한국시리즈 1차전에 기용하였고, 박동희는 4실점을 하였지만, 8이닝을 버티면서 승리투수가 되었습니다. 그 후, 염종석에 이어서 4차전에서 구원투수로 등판해서 팀의 3승째를 지켜내면서 두번째 우승을 눈앞에 두었습니다. 마지막 5차전에서 윤형배를 구원해서 승리를 거두면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2승 1세이브의 성적으로 한국시리즈 MVP를 차지하였지만, 경기내용상 에이스다운 모습을 보였다고는 할 수 없었고, 84년이 최동원에 의해서 우승하였다면 92년은 염종석이 그 주인공이었고, 박동희는 조연에 불과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94년 31세이브를 기록하면서 마무리투수로서의 성공 가능성을 보인 것을 끝으로 부상과 팀과의 불화와 나태한 생활 등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투수가 될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C급투수로 전락했고, 1997년 트레이드로 일찍이 최동원이 그랬던 것처럼 삼성의 유니폼을 입었지만, 별다른 활약없이 2001년을 끝으로 유니폼을 벗었습니다.


1991년 처음으로 열린 한일슈퍼게임에서 김성한선수의 홈런쇼를 기억하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당시 김성한선수에게 홈런을 맞은 투수중는 이라부 히데키도 있었습니다. 이라부는 노모가 메이저리그로 떠난 이후 퍼시픽리그를 대표하는 투수로서 메이저리그에서도 나름대로 맹활약했던 선수입니다. 하지만, 당시의 이라부는 150km이상을 던지는 볼만 빠른 투수에 불과하였습니다. 고교 때의 이라부는 140km 중반의 직구만을 던질 줄 아는 투수였지만, 뛰어난 체격조건으로 가능성이 높이 평가되어서 롯데에 드래프트에서 1위로 지명되면서 프로에 입문하였습니다. 1990년 8승을 거두면서 잠재력을 인정받았지만, 1991년과 1992년 연속으로 3승에 머물면서 가능성만 먹고 사는 볼만 그럭저럭 빠른 투수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 이라부가 1993년 요미우리매니아인 당시 세이부의 키요하라를 상대로 158km의 공을 던지면서 일본 전국에 이름을 알렸고, 1994년 15승을 거두면서 팀의 에이스로 성장했습니다. 그 후 용이 되어서 일본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에이스로서 승천하였습니다.


일본의 매스컴은 그가 어떤 성적을 거두는가 보다도 몇 km의 공을 던질 것인가에 주목했고, 또한 코칭스탭도 이라부에게 너라면 세계에서 가장 빠른 공을 던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 주면서 그의 장점을 살려줄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반면 박동희는 선동열처럼 뛰어난 성적을 남기지 못한다고 오히려 비난을 하였습니다. 지금도 해설가로서 엄청난 대우를 받고 있는 모해설가는 박동희가 직구를 던져서 맞으면 프로선수는 아무리 빠른 직구라도 직구만을 던지면 칠 수 있다면서 변화구를 던져야 한다고 하다가, 다음에 박동희가 변화구를 던지다가 맞으면 자신의 장점인 직구를 두고 어설픈 변화구를 던진다고 지랄염병하는 식으로 하드웨어만 뛰어나지 소프트웨어는 불량품이라는 혹평을 늘어놓았습니다. 박동희로서는 선동열이 비교대상이었다는 것이 불운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꼭 한국만의 문제라고 할 수는 없지만, 한국야구는 기다림을 모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무기가 용이 되기 위해서는 천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한데도 선동열처럼 바로 용이 아니면 999년이 된 이무기라도 용이 아니기 때문에 돌팔매질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한번도 용이 되어서 하늘을 날아보지 못한 박동희 ... 거룡이 될 수 있었던 이무기였기에 아쉬움은 남다를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요즘 한국야구에서 엄정욱선수가 강속구로서 이름을 날리고 있습니다. 엄정욱만큼은 조급증이라는 돌팔매를 맞지 않고, 그리고 승천하기 위해서는 제구력이나 변화구가 필요하다는 식으로 그의 강속구가 감속하지 않고 아우토반에서 초고속으로 승천하기를 바랍니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

top

About this post

이 글에는 아직 트랙백이 없고, 댓글 5개가 달려있고, 스포츠, 태그가 달려있으며,
2007/03/22 11:24에 작성되었습니다.

COMMENT, easiesy way to give a feedback.

종환 at 2007/03/23 10:58 링크주소 답변달기 수정/삭제

정말 박동희 선수 좋아했었는데..
근데 형, 프로'야유'계가 아니라 프로 '야구'계죠? ㅋ 야유'를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로서 하면 진짜 웃길거 같아요 ㅎㅎ

cimio at 2007/03/23 15:28 링크주소 답변달기 수정/삭제

앗, 지금에야 오타 발견. 그 짧은 글에 오타를 남기다니 ㅜ.ㅜ

난 사실 박동희 선수에 대해서는 큰 기억이 없는 것 같애. 잘하기는 전성기의 선동열과 최동원이 최고였지. 87년에 둘이 맞대결을 펼쳤는데, 15회까지 갔지만 결국 2-2로 무승부로 끝난 적이 있는데, 캬, 그건 정말 야구사에 남을 명승부였어. 요즘은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야유, 아니 아구가 시큰둥하네...

종환 at 2007/03/24 12:01 링크주소 답변달기 수정/삭제

ㅎㅎ 형도 잘 아시겠지만 저야 열열한 야구광이니..ㅋ 게다가 박동희 선수는 삼성에 있었거든요. 그래서 더욱 좋아했었죠. 선동열, 최동원, 그리고 김시진, 김일융 선수들이 있던 80년대 후반은 정말 투수들이 잘나갔던 때인거 같아요. 그만큼 투수들이 혹사당하기도 했지만요..(최동원 선수가 대표적이죠 뭐..) 전 아직도 야구가 좋은데..나이가 아직 덜 들은건가요? ㅎㅎ 메이저리그 팀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팀이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라 야구 시즌만 기다리고 있죠. 한국과 미국 모두 ㅎ

cimio at 2007/03/25 21:33 링크주소 답변달기 수정/삭제

나도 대학생때만 해도 아침에 깨면 야구 결과부터 챙겨봤는데, 언제부터인가 관심이 없어지더라.. 너는 젊음을 유지하는 것이겠지. ㅋㅋ

종환 at 2007/03/26 13:37 링크주소 답변달기 수정/삭제

철이 덜든거 같아요 ㅠㅜ

댓글 쓰기


◀ recent : [1] : previous ▶

blog information

Vision & Logic
BLOG main image
작은 인터넷 세상 VisionandLogic.net
RSS 2.0Tattertools
최근 글 최근 댓글 최근 트랙백
태그 구름사이트 링크